헐리우드의 시나리오책들
요즘 취미삼아 공부하는 것이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들입니다. 어쨌거나 영화 생산의 최대물량을 자랑하는 것이 미국 헐리우드이고, 이들의 역사는 영화 자체의 역사와 거의 같이하니만큼, '걸작' 이라고 불러줄 것도 많고, '걸작이라고 불러줄' 것이 아닌 진짜로 '걸작' 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시나리오를 쓰는 법 역시 많이 발달해 있습니다. 심산의 번역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하워드, 에드워드 마블리 공저의 <시나리오 가이드>,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린다 카우길의 <시나리오 구조의 비밀>,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등등등 국내에 들어온 책만 해도 상당한 양입니다. (물론 이 책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입니다)
그런데, 뭐 헐리우드에 사는 사람들 중의 1/2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닐까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도대체 한국에서는 왜 이리 많은 시나리오 책들이 나오는 걸까요. 심산의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 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과 같은 책도 있고, 장진의 시나리오가 책으로 묶여 출간되는 등, 시나리오가 갑자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뭐 이건 주제랑은 별 상관 없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런 시나리오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시놉시스를 잘 짜야 한다' 는 겁니다. 시놉시스가 매력적일 정도로 응축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응축된' 이야기의 약점을 이 영화는 아주 잘 보여줍니다.
어쨌거나, 키아누 리브스 홀릭인 어여쁜 언니가 '보러가자' 하셔서, 달렸습니다만, 제가 약속에 2시간 가까이 늦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표를 두 번 샀다는 우울한 이야기. 게다가, 둘 다 한국사회의 약삭빠름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1인당 13,000원을 주고 영화를 보았다는 더욱 우울한 이야기.
<지구가 멈추는 날>을 만든 사람들의 뇌가 멈추다
물론 걸작. 이겠지요. 사실 1951년의 <지구가 멈추는 날>은 그 당시에는 매우 센세이셔널했다고 합니다. 저도 백방으로 구하려고 해봤지만, 구할 수는 없더군요.
SF의 리메이크에는 사실 약점보다는 장점이 많을 겁니다. 그것도, 원작이 1951년이라는 옛날 - 그야말로 '고전' 아니면 '잊혀진' 이 되는게 정상인 영화인데 리메이크까지 그 돈 들여 하신다면야 기대를 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관객 입장에서 말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기획한 쪽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CG로 모든 것을 화면에 그려낼 수 있는 시대. 그야말로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전의 영화의 그래픽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에 나오는 것은 분명 다를 겁니다. CG 잔뜩 뿌리고, 거기에 'SF 전문배우' 가 확실한 키아누 리브스. 거기에 이제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우신 제니퍼 코넬리. 이 정도면 대충 문제는 없습니다. 투자 과정은 순탄했을 겁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는 이전의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기로 결심합니다. 원작 자체가 워낙 걸작이니, 별 문제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냥 다른 영화보다 CG의 비용을 조금 줄이고, 시나리오를 확실히 따라가면, 대박은 몰라도 중박은 확정. 게다가, 환경이라는 주제에서 인간을 '영장' 의 자리에서 내려놓는 것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Omega Man>을 리메이크한 <나는 전설이다>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매출을 올렸으니까요. 사실 <오메가 맨>도 리메이크이며, 그 대전제는 소설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1951년에는 그저 '인간이 영장이 아니면 어쩔래?' 라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파괴력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 지점도 의심이 가는데, 1970년대 한국에서 쓰여진 SF소설들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거든요. 상상력이라는 건, 생각보다 파괴력이 강합니다. 어쨌거나, 당시 센세이셔널하고 결국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니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해봅시다.
시나리오 시놉시스만 믿어서는 안된다
결과물을 보니 이건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D-War> 레벨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태생도 한국이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말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정도면 감동적이지 않느냐' 고 계속 감동을 강요하는데, 슬프게도 이 영화의 감동 수준은 스티븐 시걸이 나오는 영화들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우웨 볼이 만들었어도 이거보다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할까요, 아니면 제가 써도 나은 수준이라고 할까요.
시놉시스로 보면 좋은 영화입니다만, 정작 시나리오는 우울하기 그지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유아 수준으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영화는 74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클라이막스로 달려가는데, 동감할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꼬마는 거의 <24>의 킴을 능가하는 짜증만을 유발하고(적어도 킴은 몸매는 된단 말입니다), 외계에서 온 사자는 아-무런 생각이 없으며, 도대체 왜 그가 마지막에 생각을 바꾸는지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변덕이랄까.
거기에 표정 변화가 없는 키아누 리브스 - 그는 <엑설런트 어드벤쳐> 를 찍고 나서, 절대로 표정을 바꾸지 않겠다고 맹세한 게 아닐까 의심중입니다 - 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제니퍼 코넬리에게 이입하려고 하니, 그녀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는 캐릭터인지라, 이입이 안 됩니다. 원래 완벽한 것에는 이입이 잘 안 되거든요.
CG도 새롭지 않다
영화가 CG로도 어느 정도는 달려집니다만, 이 영화의 CG는 사실 그다지 새롭지도 않습니다. 나노머신의 아이디어는 <공각기동대> 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는 지겹다 싶은 수준의 소재이고, 특히 그 형태가 '벌레' 의 모양을 띄고 있다는 설정 자체는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거신병(!)의 존재는 사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도대체 왜 그렇게 움직이며, 왜 키아누 리브스의 말은 듣지 않는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나노 사이즈(도 아니죠. 진딧물 사이즈쯤 될까)라면, 왜 굳이 그런 '형태' 를 띄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게 비합리적이에요.
좌우간, 이 영화 절대 비추입니다. 보시려면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다른 생산적인 일이 없나 고민해보고, 74분의 고민 후에도 '그래도 봐야지' 라고 하신다면, 그래도 말리고 싶습니다. 이 글도 조금 더 진지하게 써보려다가, 힘이 빠져서 못 쓰겠어요. 에혀. 오죽하면 스포일러 만땅이라고 경고도 안 하겠습니까. 스포일러에 기분 나쁘신 쪽이 영화 봐서 기분 나쁜 거 보다 나을겁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 스포일러에 기분 나쁘신 쪽이 영화 봐서 기분 나쁜 거 보다 나을겁니다
영화가 어느 정도가 되면 이런 평이 붙는건지 덜덜덜......
아직 안 봤는데, 아무리 평이 안 좋지만 그래도 돈 처바른 눈요기라도...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도 안 되나봐요.
돈 쳐바른건 알겠는데,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_-a
이거 보시는건 절대로 정말로 영원히 비추.
정말, 제 블로그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이렇게 쓰는건 처음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
비밀댓글 입니다
웅.. 그러셨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부쉬 드 노엘은 오늘 중 하나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같은 프로세스로 만들어 문제점을 파악해 보려구요. 나름 스위트롤의 장점이라면 언제고 '묵혀팔지 않는다' 인데, 어쩌다가 그런 게 걸렸는지. (정말로, 만들어진 다음 날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워낙 많이 만들어 팔다보니)
오실 때 미리 블로그로 연락주십시오. 버선발...은 아니고 양말발... 로라도 뛰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적립쿠폰은 언제나 합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